"윤여정씨 이제 출발했다고 합니다. 20분 후 도착하니 중계는 한국 시간으로 오후 1시45분부터 하면 되겠습니다."
소속사 관계자의 전화에 워싱턴 방송 특파원단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불과 두 시간여 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씨의 공동 인터뷰가 진행될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총영사관저였다.
관저에는 윤씨가 행사 직후 올거란 소식을 듣고 찾아온 특별한 손님도 있었다. 윤씨가 수상 소감에서 '나를 일하게 만들었다'고 언급한 두 아들 중 한 명이었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따로 카메라에 담지는 않았지만, 차에서 내린 어머니를 가장 먼저 맞으며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은 취재 현장에서만 볼 수 있던 시상식 이상의 감동이었다.
"인생 오래 살고 배반 많이 당해 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윤 씨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회견 중 한 모금씩 마시는 화이트 와인이 오스카의 여배우에겐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윤씨가 갑자기 기자 쪽으로 고개를 빼더니 "필두 씨, 필주씨 왔느냐"고 물었다.
나를 찾는 것임을 직감했다. 그동안 윤씨는 JTBC와 인연이 많았다. 영화 개봉에 맞춰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손석희 사장과 인터뷰를 했고, 2017년 대선 특집 방송 때도 손 사장의 섭외에 응해 광화문 특설무대에 함께 오르기도 했다. ‘뉴스룸’의 김현정 작가와도 지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터뷰에서도 손 사장의 팬임을 감추지 않았던 그는 뉴스룸 기자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번은 어느 행사장에서 우연히 윤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어색한 자리였기에 계속 대기석에만 앉아 있었는데, 그게 안 돼 보였는지 윤씨가 먼저 다가와 "팩트체크 잘 보고 있다"며 말을 건넸고, 잠시 담소를 나눴다.
이런 연으로 회견 당일 "JTBC 김필규입니다"라고 질문을 건네자, 윤씨는 "우리 알잖아"라고 웃으며 답변을 시작했다. 앞서 이름을 잘못 말한 것에 대해선 "필규 씨구나. 내가 지금 내 정신이 아니야"라며 해명하기도 했다. 나의 질문은 "배우 윤여정에게 지금이 최고의 순간인지"였다. 물론 어떤 답이 나와도 좋은 기사 제목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평생을 미디어 앞에 노출된 삶을 살아온 74세의 배우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윤 씨의 답변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난 최고, 그런 말이 참 싫어요. 그냥 '최중' 하면 안 돼요? 같이 살면?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내 연기 철학은 열등감에서 시작됐다"거나 "오스카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겠냐"는 등의 이야기는 현장의 기자들에게도 큰 울림이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끝나자 윤씨는 "필규씨 워싱턴에서 왔나? 멀리서 왔네. 예뻐졌네"라는 말을 아직 열려 있는 마이크를 통해 내보내며 회견을 마쳤다. 전국에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오스카의 주인공에게 세 차례나 언급된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이고 유쾌한 경험이었다.
쉽지 않은 이름이라 원래도 헷갈리는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는 '필두'라고 하거나 '필주'라고 잘못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이날만큼은 ‘모두 용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