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서 YS·DJ까지…JP 속내 털었다
중앙사보 2015.12.14
'소이부답' 14개월 대장정 마무리
"중앙 정성 감복해 못 다한 말 다해" 한·일 협정 뒷얘기 등 큰 반향
김종필(90)은 은둔자였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한때 이런 말도 했다. “나는 회고록 같은 건 안 써.” 중앙일보 기자의 숙명이라고 할까. 나는 오랜 세월 김종필(JP)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2011년 여름이었다. 편집국장이던 나는 남산 산책길에 JP와 함께 있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았고 나는 휠체어를 밀었다. 옆에서 JP의 셋째 형님인 종락(2013년 작고)씨가 같이 걸었다. “총재님, 회고록을 중앙일보에 쓰십시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JP는 “안 써”라고 답했다. “왜 안 씁니까”라고 되묻자 그는 “쓰면 뭐하나. 읽어 줄 사람이 없는데”라고 말한다. 나는 “읽어 줄 사람이 왜 없습니까. 국민이 있잖아요”라고 재차 요청했다. JP는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채 묵연히 앞만 쳐다보았다. 그해 나와 JP는 그런 문답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다른 언론사는 JP의 산책길까지 찾아오진 않았지만 청구동(JP의 자택)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JP의 회고는 우리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JP는 중앙일보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졌어. 중앙의 겸손과 정성에 졌어.” 
2014년 10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14개월간 증언록 취재와 기사를 구성하면서 JP가 4년 전 던졌던 선문답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읽어 줄 사람이 없어서 쓰기 싫었다는 JP의 회고록, JP는 누가 자기의 현대사 증언을 읽어주길 기대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니 JP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다 못하게 막았어. 전국 소년스포츠단을 조직하려고 해도 못하게 했고, 음악 영재에게 장학금을 줘 세계 무대에서 키우려 해도 중단시켰지. 박 대통령은 당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내가 자꾸 벌이는 걸 싫어한 거야. 내가 무슨 딴생각을 품고 당신 자리라도 뺏을까 봐 걱정했었지. 내가 오늘 그런 상념이 일었는데, 일종의 ‘권력자의 질투’라고 할까.” 11월 중순, JP와 일대일로 마지막 인터뷰를 하던 자리. JP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이렇게 쏟아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자신에 대한 태도를 권력자의 질투라는 말로 표현했다.
1949년 육군본부 문관과 정보국 소위로 처음 만난 박정희와 김종필은 79년 대통령 서거까지 30년 동안 전쟁·가족·혁명·근대화·한일협정·유신·권력 유지에서 서로 인생의 동반자였다. 박정희는 끝없이 2인자를 쳐내면서도 김종필만은 보호했고, 김종필은 온갖 의심과 견제 속에서도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JP가 마지막 인터뷰에서 미리 준비해 던진 직설인 만큼 ‘권력자의 질투’는 그가 증언록에서 진정 하고 싶었던 얘기였을 것이다. JP는 박정희 살아생전 30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또 30여 년 가슴속 깊이 묻어 놨던 박 대통령에 대한 한과 섭섭함을 속시원히 털어내 가뿐한 표정이었다. ‘서산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이 되고 싶었다’ ‘민주주의는 피가 아니라 빵을 먹고 자란다’는 JP의 인생관, 국가관은 한편으로 장엄했다. 다른 한편 평생 존경했던 1인자에 대해 인생의 귀로에서 털어놓은 솔직한 감정 표현은 JP의 다정다감한 성정(性情)에 매력을 더했다.
전영기 김종필 증언록팀장·논설위원
전영기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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